마을 위한 기도 / 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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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위한 기도
이 해인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좋은 열매를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언어의 나무
내가 지닌 언어의 나무에도
멀고 가까운 이웃들이 주고 간
크고 작은 말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둥근 것 모난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향기로운 것
그 주인은 잊었어도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와 함께 머뭅니다
살아있는 동안
참 많은 것도 같고 적은 것도 같고
그러나 말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살
매일매일 돌같이 차고
단단한 결심을 해도
슬기로운 말의 주인이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 지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하여
헤프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유쾌하고
과장하지 않으면서 품위 있는
한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내게 하소서
내가 이웃에게 말을 할 때에는
하찮은 농담이라도
함부로 지껄이지 않게 도와 주시어
좀더 겸허하게 좀더 인내롭고
좀더 분별 있는 사랑의 말을 하게 하소서
나만의 새로운 마음,
깨어 있는 마음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내 언어의 집을 짓게 하시어
해처럼 환히 빛나는 삶을
노래처럼 즐거운 삶을
당신의 은총 속에
이어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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