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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11, 김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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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정남
댓글 0건 조회 3,809회 작성일 13-05-27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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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11 김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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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신호등을 바라보며

한 여자가 횡단보도 건너 저편에

핸들을 잡고 멈추어 있다,

나도 붉은 신호등을 바라보며

횡단보도 이편에 핸들을 잡고 멈추어 앉아 있다,

붉은 신호등이 이렇게 모르는 두 여자를

잠잠히 마주보게 만든 그 고유의 순간

 

초침이 두 여자의 얼굴 위로 사각사각 지나가며

사과 껍질을 얇게 벗겨내듯

과도 칼의 저미는 움직임이 얼굴 위에 느껴진다

유의해서 보아야 할 아무 특이한 점이 없는데도

무언가에 끌려서

벙어리 지뢰처럼 서로를 긴장에 차서 바라본 그 순간

 

붉은 신호등이 푸른 신호등으로 바뀌고

급히 전진을 해야 할 시간이 왔다

모든 인연을 끊고 질주해 나가야 할 이 진군의 시간

얼핏 스치며 나는 움직이지 않는 그녀를 이상하게 바라본다

그녀의 차는 움직이지 않는다

 

뒷 차들은 빵빵 경적을 울려대며

일 분 일 초에 일생을 건 사람들처럼 미친 늑대의 소리를 내지른다

사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일 분 일 초에 목숨을 건 미친 늑대들인 것이다

그녀의 차는 그래도 움직이지 않는다

 

스치면서 그녀의 얼굴을 흘깃 들여다본다

백합처럼 하얗게 굳은 얼굴,

왼쪽 콧구멍에서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붉은 피는 아까 전부터 흘러내렸는지

미색 가을 정장 윗도리 가슴 편에

아름다운 꽃다발이 뭉글뭉글 피어올라 있다

급성 뇌출혈,

가슴에서 뭉게뭉게 꽃피어 올라가는 꽃다발 헌정의 순간

 

그녀도 집에 닦지 못한 식기를 한 아름 싱크대 위에

버려두고 도망치듯 나온 여자였을까,

강의 준비를 못하여 발을 동동 구르며

아홉시 수업에 늦지 않게 당도하려고

미친 듯 페달을 밟던 여자였을까,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는 말을 그저께 들었던,

시부모로부터 네가 인간이냐는 말을 어저께 들었던,

친정 어머니로 부터 전세 값이 올랐는데

이사 날짜는 다가오고 어쩌면 좋으냐는 말을

아침에 들었던

 

그 여자였을까,

당신의 사랑은 거기서 더 기어갈 수 없었을까

 

사람들은 모두 다 끝나지 않는 사랑의 이야기를 가진다

내 차는 그녀의 차를 스쳐 지나가며

소리쳐 물어 본다

왜 그렇게 핸들을 꽉 잡고 있는 거냐고,

당신의 사랑은 더 갈 수 없었던 거냐고,

거기서 멈추어 버린 어떤 피로, 어떤 갈망,

미친 코다에 대한 그리움이

또 내 차를 미친 듯이 몰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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